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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 일 섭 / 염우구박인문학교실 운영자 |
| ⓒ 순창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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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어린 시절은 대부분 다 가난했다. 나는 제때에 중학교에 가지 못했다. 1년 늦게 중학교에 입학하는 바람에 후배들과 동급생이 되었지만, 학교생활은 언제나 신나고 즐거웠다. 그런 어느 날,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간이 매점을 운영했다. 따로 공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선생님들의 숙직실 벽장에다 아이들의 간식거리와 문구 등을 팔았다. 선생님은 나와 P라는 친구에게 그 일을 맡겼다. 그 대가도 적지 않았다. 정확하게 기억하는지는 모르지만, 한 달에 4,000원씩 준다고 했던 것 같다.
점심시간마다 학생들에게 시내에서 배달된 찐빵과 뽀빠이 등을 팔았다. 당시 학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과자는 뽀빠이였다. 40g짜리 뽀빠이 한 봉 값이 10원이었다. 어쩌다 용돈이라도 생기면 그 뽀빠이 과자를 사 먹는 게 큰 기쁨이었다.
나와 친구는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요샛말로 하면 아르바이트를 한 셈이다. 그 친구도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두 해나 집안일을 하다가 학교에 다녔다. 이런 공통점이 있어서 그런지 우리는 만나자마자 단짝 친구가 되었다. 마음이 척척 맞아서 참 재미있게 석 달 동안이나 함께 일했다. 처음에는 매점 일을 하는 것이 매구 쑥스럽기도 하고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얼마 전의 일이다. 중·고등학교 교내 매점에서 빵을 팔았던 분들이 한 분은 국회의장이 되고, 다른 한 분은 대학 총장이 되었다는 성공담을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들의 학창 시절을 떠올려 보았다. 예전에는 가난한 집의 학생들이 이런 일을 하며 학비를 보탰는데, 흔이 있는 일이었다.
아무튼 점심 때가 되면 친구들이 돈을 척척 내면서 군것질하는 모습이 부럽기도 했다. 나와 친구는 그런 일에 기죽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잘 버텨냈다. 한 달만 지나면 거금 4,000원을 손에 쥘 수 있다는 생각에 저절로 기분이 좋았다. 그 액수는 당시로서는 꽤 많은 돈이었고, 부잣집 친구들도 그 정도의 용돈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매일 정산을 하면서 그 일을 했다. 단 1원도 탐내지 않고 매점의 물건을 팔았다. 한 달이 그렇게 긴 시간이라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드디어 한 달이 되는 날이 다가왔다. 직장인들이 월급 날짜 기다리듯 얼마나 기다려왔던 날인가. 금방이라도 선생님이 우리를 불러 노란 봉투를 건네줄 것이라는 기대로 하루 내내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수업을 마치고 귀가할 때까지 우리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친구와 나는 크게 실망했지만, 선생님께 아무 말도 못 하고 허전한 마음으로 돌아서야 했다.
두 번째 달도 그렇게 지나갔다. 그날그날 판매 대금을 선생님이 가져갔고, 필요한 물건들은 그때그때 들여왔지만, 우리는 월급을 단 한 푼도 받지 못한 채 3개월을 넘겼다. 매월 4.000이라는 거금을 상상하면서 이런저런 계획을 세웠던 우리로서는 큰 실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친구와 나는 단 10원도 어긋나지 않도록 계산을 맞추느라 정신이 없었다. 친구와 나도 당시에는 어린아이에 불과했고, 친구들이 군것질할 때는 한없이 그들을 부러워했다. 어쩌다가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뽀빠이 한 봉지라도 먹은 날이면, 부모님에게 거짓말이라도 해서 그 돈을 채워 놓았다. 그런데 3개월 동안 월급을 받지 못한 상황이 되면서 우리는 조금씩 대담해지기 시작했다. 따지고 보면 우리에게는 이미 각각 12,000원이나 되는 거금이 있는 셈이니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찐빵이나 뽀빠이 몇 개를 축낸다 해도 우리가 받을 돈으로 언제든지 변제가 가능할 만큼 충분한 돈을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나와 친구는 그때부터는 예전처럼 긴장하지는 않았다. 먹고 싶을 때는 뽀빠이를 한 봉지씩 나눠 들고 먹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말이 맞다. 우리는 나날이 대담해졌다. 날마다 우리는 우리만의 외상장부를 들여다보면서도 그렇다고 위축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받을 돈이 12,000원이나 된 데다가 4개월째 이어가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는 사이에 친구와 나의 외상값이 1,000원 가까이 되었다. 선생님이 알까 봐서 걱정이 되었다. 바로 그 무렵, 하루는 선생님이 재고조사를 하자는 것이었다. 나와 친구는 당황스러웠지만, 1,000원 정도 되는 돈을 채워 놓을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죽을죄를 진 것처럼 위축되지도 않았다. 사대로 말씀드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선생님과 함께 재고를 파악해 보니 정확하게 우리가 야금야금 먹은 만큼 돈이 부족했다. 선생님은 화난 얼굴로 우리를 번갈아 보더니, 대 뿌리로 만든 회초리를 들었다. 나와 친구의 못된 버릇을 고쳐주겠다는 모양이었다. 우리가 받을 돈이 상당이 있음에도 우리는 화난 선생님이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선생님은 우리를 불러 세우더니 매질하기 시작했다. 나는 한 대를 맞고 너무 아파 통증을 참으로 뒤로 물러섰다. 선생님은 다시 앞으로 오라고 했지만 나는 가지 않았다. 그러고는 선생님을 빤히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은 김일성보다 더 나빠요!”
선생님은 내 이 한마디에 흠칫 놀라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왜 자신이 김일성보다 나쁘냐고 물었다. 나는 이미 참았던 말이 터진 만큼 당당하게 다음 말을 이어냈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한 달에 4,000원씩 준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지금까지 단돈 10원도 주지 않고 일만 시켰잖아요.”
선생님은 이런 내 말에 아무 말도 못 하고 노려보더니 교무실로 가버렸다. 한참 후에 담임 선생님이 우리에게로 와서 자초지종을 물었다. 우리는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담임 선생님은 이런 내 이야기를 듣더니 알았다며 돌아갔다.
그 후로 우리는 해직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당연히 받아야 할 12,000원씩은 끝내 우리 손에 오지 않았다. 친구와 내가 받아야 할 돈 24,000원이 약 1,000원어치의 외상 군것질로 변재되면서 우리의 3개월 공력은 허탕이 되고 말았다. 지금 같으면 절대로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 일은 벌써 50년이 지난 옛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지금도 가끔 그 순간이 떠오를 때가 있다. 선생님이 나의 버릇없는 말에 얼마나 속상했을까 생각해 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어린 우리를 무시했던 그 야속함은 오래오래 잊히지 않았다. 우리가 축낸 1,000원에는 그렇게 예민하면서도 어린 제자들의 공력은 왜 그렇게 하찮게 여겼을까. 지금 생각하면 웃음도 나오고 살짝 미안한 생각도 든다.
”선생님은 김일성보다 더 나빠요.“
송일섭 / 염우구박인문학교실 운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