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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순창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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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상가(喪家)에 가서 처음으로 조문(弔問)했던 때가 중3 때의 이다. 산안 마을에 사는 우리 반 친구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반 대표로 담임 선생님과 함께 조문을 갔다. ‘산안’이라는 이름은 그 자체로서 ‘산 속’임을 일깨운다. 추측건대 회문산 깊숙이에 있다고 하여 ‘산안’이라 했을 것이다. 구림 소재지에서 연산천(川)을 따라 치내 마을과 베트라 마을을 지나서 ‘노루 목 모양의 고개’라는 뜻의 ‘노루목’을 통과해야 하고, 거기서도 한참을 더 내려가서 병풍처럼 막아선 산을 산양(山羊)이 벼랑을 타듯 넘어가야 나오는 마을이다. 지금은 도로가 개설되어 있어 구림천을 따라 가다 만일사 아래 ‘고추장 익어가는 민속 마을’쯤에서 산 쪽으로 가면 쉽게 닿는 마을이다.
어릴 적에 나도 산골짜기에서 살았지만, 우리 마을은 회문산 아래 이 산안 마을과 비교하면 평야지처럼 훤하고 넓다고 생각했다. 우리 일행은 숨을 할딱거리면서 그 산비탈을 올랐다. 예전에 마을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어 다니면서 고생했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이 가파른 고개를 넘지 않으면 세상 돌아가는 꼴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시장에도 가고, 면 소재지도 가고, 베트라에 있는 초등학교에 가는 것도 이 고갯길을 넘어야 했다. 그래서 그런지 이 동네 친구들은 하나 같이 건강하고 운동도 잘했다. 매일 군부대 유격훈련장의 산악코스 같은 이 고개를 넘어 다녔으니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땀을 뻘뻘 흘리고 숨을 가쁘게 몰아쉬면서 그 고갯마루에 올랐다. 또 올라온 만큼의 깔끄막을 타고 내려가야 했다. 골짜기에 이르자 회문산 깊은 곳에서 발원한 물이 시원하게 흘러갔다. 또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서야 마을이 나왔다. 회문산 자락 능선에 자리잡은 친구네 집은 모양새가 근사했다. 날아갈 듯한 기와집에다 널찍한 대문, 그리고 마을이 한눈에 보이는 사랑채는 선비들의 귀거래서를 떠올릴 만큼 특별했다. 조문을 마친 우리는 사랑채로 안내되었다. 사랑채에서 바라보니 조금 전에 할딱거리며 넘었던 고갯마루가 턱에 닿을 듯 가깝게 느껴졌다. .
선생님을 따라 조문한 친구들은 상가(喪家)에서 차려준 음식을 먹으면서 떠들었지만, 나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신기하게 느껴졌다. 회문산 깊숙한 골짜기에 마을이 있는 것도 그렇고, 깔끄막에 들어선 집들도 특별했다. 친구 아버님께서 마을 훈장을 하셔서 그런지 금방이라도 글 읽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릴 것 같았다. 조문한 이야기를 아버지께 말씀드렸더니, 그 마을은 매우 유서 깊은 마을인데다가 마을 서당이 있어서 유가적 전통을 잘 이어온 마을이라고 하였다. 예전의 시골의 사람살이는 마을은 달라도 서로 거울 속을 보듯 훤했다. 아버지는 6.25 전쟁 동안에 일어난 마을의 애틋한 비사(秘史)를 많이 알고 계셨다.
그날 저녁 아버지에게서 들은 산안 마을 이야기는 낮에 본 풍경 못지않게 내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2022년 가을로 기억된다. 전주시립극단에서 차범석의 희곡 《산불》을 ‘회문산 이야기’로 개작하여 공연하였는데, 나는 그 연극을 보면서 어린 시절 아버지가 들려준 산안 마을 이야기를 아주 생생하게 떠올렸다.
회문산에는 조선의 5대 명당 중 하나가 있는데, 그게 바로 ‘오선위기’라는 자리다. 이는 ‘다섯 신선이 바둑을 두는 형상’을 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누구도 찾지 못한 베일 속의 명당이 회문산에 있다고 한다. 얼마 전에는 북한 인민무력부장이었던 황병서의 조상 묘가 순창 회문산에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여전히 명당을 찾아다니는 마니아들이 즐겨 찾는 곳이 바로 회문산이다. 이러한 회문산의 정기를 받아 한없이 평화롭기만 하던 이 마을에도 6.25 전쟁은 커다란 상처를 안겨 주었다. 당시 산간 지방은 밤과 낮이 서로 다른 세상이었다. 낮에는 국군이, 밤에는 인민군이 장악하는 세상, 그러다 보니 마을 사람들도 편이 갈려 서로 미워하고 대립하면서 많은 상처를 입게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산안 마을 앞 고개마루에는 명절 때마다 진풍경이 벌어졌다. 말쑥한 차림의 도시풍의 노인네들이 비지땀을 흘리면서 고개로 올라와서는 선뜻 마을로 내려서지 못한 채, 한참 동안 동네를 찹잡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다가 마을 뒤편에 묻힌 자기 조상묘를 향해 절을 했다. 그 사람들은 전쟁 중에 마을 사람들을 못살게 해코지한 사람들이다. 그랬으니 마을로 어떻게 들어서겠는가. 곡절이 많았던 근현대사 속의 우리들로서는 이런 일이 어찌 산안 마을만의 일이겠는가.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들은 이 이야기는 오래도록 내 가슴에 얹혀 있다가 졸시 〈산안마을〉이라는 시로 태어났다.
회문산 자락 / 만일사 아래 / 가파른 능선 따라 / 바짝 엎드린 / 산안 마을 / 고샅길은 / 노인네의 손등처럼 / 다닥다닥 얽혀 있지만 / 사람 하나 / 보이지 않은 대낮 오후 / 개만 홀로 컹컹 짖을 뿐 / *지우펀 거리에서 / 대만의 속살이 보였듯이 / 고개 쳐든 / 깔끄막에 넘쳤던 노도(怒濤) / 서로 삿대질하던 / 야만(野蠻)의 역사가 스쳤다. / 그날 이후 / 고향을 버렸다는 / 빨치산 출신 노인네 / 피울음으로 한철 귀촉도 서럽던 / 고갯마루의 짠한 전설도 / 이제는 / 한 시대의 그림자일 뿐 / 회관 앞에서 만난 / 꾸부정한 영감님은 / 공기 좋고 / 물 시원한 곳 / 여그말고는 없다 한다. / 출처 : 송일섭의 〈산안마을〉
*산안 마을 : 전북 순창군 구림면 안정리 회문산 자락에 있는 마을
*지우펀 : 대만의 산속 마을, 대만의 전통문화를 엿볼 수 있는 곳
지금은 자동차로 동네 뒤편에 있는 만일사(萬日寺)까지도 차로 오르내릴 수 있을 만큼 길이 잘 다듬어져 있다. 나는 가끔 고향에 가면 이 길을 자주 찾곤 했다. 산안 마을을 거쳐 가면서 중3 시절의 조문 풍경도 생각하고, 아버지에게 들었던 고개마루의 늙은 빨치산 영감님도 떠올려 본다. 회문산 속에 신비롭게 숨어 있던 산안 마을이 이제는‘자연인’을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또 하나의 ‘유토피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송일섭 / 염우구박인문학교실 운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