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인물포커스 출향인

사는 것을 놀이처럼, 위버멘쉬

순창신문 기자 입력 2024.12.11 10:29 수정 2024.12.11 10:29

↑↑ 이 승 주 / 광고대행사 미디어사업본부 본부장(편집국장)
ⓒ 순창신문---


중년이 되고 보니 주변에 알코올에 의지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된다. 거의 매일 술을 마시는 것이다. 낙이 없다, 외롭다, 고독하다, 지나온 삶을 반추해보니 모두 허망하다, 의욕이 없다, 화가 나거나 분노만 인다, 미래를 생각하면 불안하기만 하다, 등등의 이유를 든다. 과거에 대한 우울과 미래에 대한 불안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보건복지부에서 조사한 정신질환 발병률 1위가 불안장애와 우울증이라고 한다. 평생 유병률로는 알코올사용장애가 가장 많다고 한다. ‘보약 같은(?) 친구’와 매일 어울려 앉아 술을 마시다 보면, 그 순간만큼은 불안과 우울을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매일 혼자 술을 즐기는 사람도 너무 많이 본다. 두통, 설사, 수면장애로 고통받는 비알코올파들도 많다. 끊임없이 누군가를 만나야만 하는 사람도 있고, 필사적으로 어느 누구와도 피하려고만 하는 사람도 있다. ‘탕진잼’에 빠진 사람들도 부지기수이다. 공황장애, 광장공포증, 범불안장애, 사회불안장애, 분리불안장애, 강박장애, 신체질환에 의한 불안장애, 약물에 의한 불안장애, 각종 스트레스 관련장애 등등 우리를 둘러싼 불안장애는 수없이 많다. 우리 삶은 현실의 조건 때문에 늘 위축되어 있다. 우리를 얽매는 제약을 좀 해결해보려 하면, 어느새 비슷한 종류의 새로운 제약이 우리를 꽁꽁 결박해버린다. 마치 나에게 적의를 가진 어떤 유령이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다 장악해버리고 있는 것처럼, 내 목을 조르는 누군가의 손아귀를 목덜미에서 느낀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의 낙타의 삶을 살다가 사자의 삶을 조금 맛보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존재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중년 이후로는 적극적으로 아이의 삶을 톺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니체의 대표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논증이 아닌 비유와 상징으로 가득하다. 세상이 허무주의로 가득할 때, 나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려면 세 단계의 변신이 필요하다고 니체는 말한다. “우리의 정신이 낙타로 변하고, 낙타가 사자로 변하고, 사자가 아이로 변해야 한다”는 것. 낙타는 무거운 부담을 견디며 사막을 건너는 인내의 정신과 ‘너는 해야만 한다’라는 도덕적 복종을 상징한다. 사자는 나의 삶을 억압하고 제한했던 모든 구속을 부술 수 있는 자유로운 정신을 의미한다. 아이는 무한한 긍정의 힘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놀이처럼 받아들이며, 무거운 짐, 영원히 반복되는 목표 없는 삶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가벼움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낙타 단계에서는 정언명령과 사회의 위계질서를 따르고 현재 생존하는 것에만 의의를 두고 성실하게 현재만을 살아가는 상태이다. 사자 단계는 자발적인 정신을 가지며 속박과 질서에 대항하여 자유를 쟁취하려는 상태이다. 아이는 순진무구하며 규범이나 부채를 알지 못하는 정신상태로서 주체성이 있고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려는 상태, 즉 초인에 가장 가까운 상태이다.

어린 시절, 내 고향 순창에서의 삶을 생각해보면, 그것이야말로 니체가 말하는 아이의 단계 즉, 초인에 가까운 삶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혹한과 혹서도 가리지 않고 물놀이, 썰매타기, 자치기, 오징어게임, 딱지치기, 구슬치기, 전쟁놀이 등 수많은 놀이에 열중했다. 어쩌면 놀이를 위한 삶이었을 것이다. 가을걷이가 끝난 볏단 위에서 콩콩 뛰어오르며 해 저물 녘 노을을 보았다. ‘밥 먹으라’는 엄마의 귀가 명령이 부당하다고 느낄 정도로 노는 것에 진심이었다. 밤과 감과 살구와 참외와 수박과 오이와 당근과 산 열매를 찾아 광개토대왕처럼 혹은 이순신과 강감찬 장군이 되어 산과 들판을 호령했다. 규범이나 부채를 알지 못하는 ‘나로서 나인’ 나의 광장, 천하가 나 하고 싶은 것을 맘껏 할 수 있었던, 그것이 ‘내 삶 그 자체’였던 초인에 가까운 삶이었다. 고향과 어린 시절은, 그래서 얼마나 소중한가? 그리고 나는 중년이 되고 보니 어린이의 삶을 살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깊이 깨닫는다.
나는 오늘도 걷는다. 도시의 거리를, 산과 자연을, ‘인생 따위를 생각하지 않는 인생’을 걷는다. 의무나 책임 따위와 같은 무거운 것들을 버리고 기분 좋은 추방의 느낌을 즐긴다. 추방된 자의 자부심과 희열을 느껴도 되는 나이가 아니겠는가? 까이꺼!
사는 것을 놀이처럼. 위버멘쉬. I am as I am.

이승주 / 광고대행사 미디어사업본부 본부장(편집국장)


저작권자 순창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