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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권자를 향한 하극상의 경계, 벌걸주론

순창신문 기자 입력 2026.09.23 17:51 수정 2026.09.23 05:51

↑↑ 전. 풍산면장 임재호
ⓒ 순창신문


“벌걸주론(伐桀紂論)”은 중국의 하(夏)나라 마지막 걸(桀)왕을 은(殷)나라를 세운 탕(湯)임금이, 은(殷)나라의 마지막 주(紂)왕은 주(周)나라를 세운 무(武)왕이 즉, 그들의 신하가 그 임금을 방벌하고 주살하여 왕권을 빼앗은 하극상을 빗대어 일어나는 당시 조선 개국 세력의 왕권 찬탈을 의(義)와 인(仁), 윤리(倫理)에 기초하여 옳지 않다는 것을 강론하고 있다. 이 벌걸주론은 호계사에 배향된 두문재(杜門齋) 임선미(林先味, 1337~1394)의 유일한 유문(遺文)으로, 이 주창은 성리학의 신흥 사대부 등 유림들에게 크게 영향을 미쳤고, 그로 인해 후세 사림들은 조선 개국을 끝까지 부정하며 항거했던 “두문동 72현” 중에서도 임선미를 가장 으뜸으로 추앙했다.

이러한 하극상의 경계가 600년 전에 큰 울림이 있었음에도 역사는 반복되어 현대 민주주의 세계사에서도 심심치 않게 발생했고, 지난 2024년 12월 3일 윤석열 전 대통령 일당의 친위 쿠테타, 내란도 주권자인 국민을 향해 일종의 하극상이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일선 자치단체장으로부터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선출직 권력자가 위임 받은 권력으로 국민을 위한다며 기만과 술책으로 주권자를 억압하고 유린하는 행위가 진심으로 없었는지, 옛 성현의 강론을 되새기며 성찰하자는 마음에서 이 “벌걸주론”을 소개한다.

「벌걸주론」떳떳함을 지키면서 만세의 강상(綱常)을 부지하는 것은 바뀌지 않는 의리이고, 난폭함을 제거하면서 일시의 도탄을 구하는 것은 권변(權變)의 어짊이다. 그런데 일시의 도탄은 비록 긍휼히 여기지 않을 수 없으나 만세의 강상은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면 그 일시의 권변으로 만세의 대의를 폐할 수 있겠는가? 옛날 명조(鳴條)에서 군사들과 맹세하며 혜후(徯后)하는 소망을 위로하며 걸(桀)을 방벌한 이는 은나라의 탕임금이고, 목야(牧野)에서 도끼를 잡고서 가뭄에 비를 바라는 대망에 답하며 주(紂)를 주살한 이는 주나라의 무왕이다. 그렇다면 누가 백성을 구한다고 그렇게 말하지 않겠는가? 누가 세상을 구제한다고 그렇게 말하지 않겠는가? 아! 이는 역순(逆順)의 뜻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슨 법칙이겠는가? 탕임금과 무왕이 비록 성인이지만 직분은 신하이고, 걸과 주가 비록 포악하나 직위는 임금이다.

신하로 임금을 치는 것이 옳겠는가?

그렇다면 신하로 임금을 치는 것이 옳겠는가? 그러므로 말하기를 탕임금과 무왕은 천리를 용납하지 않은 것이고 정명을 마땅히 먼저 해야 하는 것이다. 무릇 안으로는 부모와 자식이고 밖으로는 임금과 신하의 관계는 사람의 큰 윤리이다. 성현이 도(道)를 행하는 데 급급한 것이 어찌 다른 것이 있었겠는가? 장차 큰 윤리를 천하에 밝히려는 것이다. 그런데 먼저 그 임금과 신하의 큰 윤리를 어지럽힐 적에 장차 어떻게 천하에 밝히겠는가? 비록 백성을 구하는 것에 간절하지만, 그렇지만 백성이 편안해질 수 있을 적에는 임금을 칠 수 있겠는가? 대저 걸과 주가 마음을 고쳐먹는 것이 없어 해악이 사해로 흘러간다면 탕임금과 무왕의 성스러움으로 그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을 어찌 차마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하면 마땅함을 얻겠는가? 방벌하여 스스로 원망하고 스스로 다스린 뒤에 그 왕위를 회복시키는 것이 옳을 것이다.

만약 부득이하여 방벌한다면 하나라와 은나라의 즈음에 당하여 [글자들이 빠짐] 기자(箕子)의 현명함도 진실로 제후를 조회하게 하고 천하를 소유할 것이라면 억조 백성의 군사(君師)를 세우게 되어 북면(北面)하여 신하로 섬기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무엇 때문에 정벌하여 스스로 <왕위를> 차지할 것인가? 그러므로 내가 “그 마음이 난포함을 제거하고 백성을 구원하는 데 있지 않고 천하를 차지하는 데 있다”라고 말하겠다. 그렇다면 천하를 취하는 것을 마음으로 여기는 자가 어찌 성인으로 천하를 공변되게 하는 마음이겠는가?

그래서 성탕(成湯)이 하나라를 정벌하고도 오히려 덕에 부끄러움이 있었다면 그 무왕에게 있어서도 유독 마음에 부끄럽지 않았겠는가? 어떤 이가 “만일 탕임금과 무왕으로 하여금 걸과 주를 정벌하지 않고 백성들을 구제한다면 생민의 무리들이 극진할 것인데, 뒷날 임금이 된 자는 임금을 위하고 관리를 세우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나, 이것은 통하지 않는 의논이다. 이것은 무슨 법칙을 말하는 것이겠는가? 탕임금과 무왕이 백성을 구원했다는 것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임금이 임금답지 않고 신하가 신하답지 않는다면 ...

그러나 천하 만세에 그 임금을 미워하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탕임금과 무왕을 핑계로 삼아 탕임금과 무왕의 일에 발자국을 맞대면서 점점 임금이 임금답지 않고 신하가 신하답지 않는 데까지 이르러 강상을 없앤 자가 그 몇 사람인지를 알지 못한다면 비록 탕임금과 무왕 한 사람이 걸과 주 한 사람을 칠 것이나, 만세에 있어서는 탕임금과 무왕 만 명이 걸과 주 만 명을 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폭압을 제거하고 백성을 구할 적에는 시해하고 빼앗은 효시라고 말하지 않겠노라. 오호라! 천하를 셋으로 나누어 그 둘을 소유하고도 복종하며 은나라를 섬긴 자가 문왕이니, 무왕은 그 자식인데 어찌 이와 같이 그 배반했는가? 그래서 우리 부자는 혹 “지극한 덕이다”는 것으로 칭송하기도 하였고, 혹 “죄다 선하지 못하다”는 것으로 칭송하기도 하였다면 탕임금에게 그 빛이 있을 것이다. 비록 그러하나 이것은 모두 틈이 터럭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니, 하루 사이에 천명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다면 이것은 임금과 신하가 되고, 당일에 천명(天命)이 끊어졌다면 이것은 독부(獨夫)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명의 끊기고 끊기지 않음을 무엇으로써 아는가? 인정(人情)이 천의(天意)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나라 사람들이 크게 붕괴될 적에 약속하지 않고도 모인 제후들이 8백이나 되었다면 어찌 사람들이 돌아가고 하늘이 명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탕임금과 무왕의 일은 진실로 부득이한 경우에 나온 것이니, 어찌 그 본심이겠는가?

「출처, 전남대학교 이형성 교수 논문 」

전. 풍산면장 임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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