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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승주 / 광고대행사 미디어사업본부 본부장 |
| ⓒ 순창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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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를 다닐 때 나는 순창 읍내 학교까지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고, 졸업 뒤에는 도시에서 살았다. 군대를 다녀왔고, 대학과 대학원 석사를 마쳤고, 결혼하고 직장을 얻었다. 그 뒤로 줄곧 도시에서 살고 있다. 몸은 도시에 있었지만, 입맛은 오래전 고향을 떠난 적이 없었다.
지난 주말 나는 삼계탕을 끓였다. 소주 한 병을 곁에 두고 천천히 먹었다. 삼계탕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집을 떠나 살았으니, 집에 내려갈 때마다 어머니는 토종닭을 삶아 삼계탕을 끓여주셨다. 닭 한 마리를 거의 다 먹었다. 퍽퍽한 가슴살만 조금 남겼다. 삼계탕은 내게 음식이 아니라 고향의 냄새다. 어머니의 손길이다. 이제 어머니는 치매를 앓고 계신다. 더는 어머니가 끓여주신 삼계탕을 먹을 수 없다. 그 사실이 국물보다 먼저 목을 메게 한다. 그래서 나는 가끔 삼계탕을 직접 끓인다. 여름이면 더 자주 끓인다. 소주를 한잔 따르면 어머니 생각이 나고, 고향 생각이 따라온다. 이제는 내가 고향에 내려갈 때마다 부모님께 삼계탕을 끓여드린다. 삶은 그렇게 자리를 바꾼다.
직장 동료들은 내 몸이 단단하다며 시골에서 자란 덕이라고 말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가난했지만 먹을거리는 가난하지 않았다. 계절마다 산과 들이 밥상을 차렸다.
여름이면 밭에는 오이와 가지와 토마토가 열렸다. 참외와 수박이 익었다. 우리 밭이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이웃집에는 살구와 자두가 있었고, 비 오는 날이면 부추전과 김치전, 파전이 부엌에서 쏴아아, 치지직, 토도독 소리를 내며 익어 갔다. 어머니가 삶아 주신 옥수수와 감자는 여름 냄새였다. 부채질로 모기를 쫓아내며 먹던 옥수수, 손바닥으로 탁 친 다음 납작하게 만든 뒤 먹던 감자. 아침에 먹고 남은 밥은 소쿠리에 담아 마루에 걸어 두었다. 한낮이 되면 적당히 식은 그 밥을 상추에 싸 먹었다. 된장찌개를 후루룩 들이키고, 풋고추를 아사삭 씹어먹던 그 맛은 지금도 입안에 남아 있다.
가을이 오면 뒷산은 놀이터이자 먹거리 창고였다. 밤을 줍고 감을 따고 들열매를 따 먹었다. 메뚜기를 잡아 구워 먹었고, 개구리도 먹었다. 동네 형들이 잡아 준 뱀고기도 겁 없이 씹었다. 시월이면 문중 시제를 따라다니며 사과와 배, 대추와 밤, 문어포와 부꾸미를 얻어먹었다.
겨울에는 추수한 고구마를 삶아 먹고 구워 먹고, 항아리에 담가 땅에 묻어 둔 동치미를 꺼냈다. 동짓날이면 새알을 넣은 동지죽을 큰 가마솥으로 끓였다. 며칠씩 먹어도 줄지 않았다. 차게 얼어 단단해진 죽을 퍼 와 동치미와 함께 먹던 맛은 겨울의 맛이었다.
봄이 다가설 무렵이면 삽과 곡괭이를 들고 산에 올라 칡을 캤다. 보리를 불에 그슬려 손바닥에 올려놓고 비빈 후 껍데기를 후 불어내고 먹었다. 입안에 번지는 그을음 냄새가 봄의 시작이었다. 상대적으로 먹을거리가 부족했던 봄엔 생쌀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씹었다. 혹은 프라이팬에 설탕과 함께 볶아서 먹기도 했다. 지금 같은 과자들이 없었던 시골에선 그게 거의 유일한 과자였다.
명절이면 떡국과 약식, 약과, 강정을 먹었다. 수정과와 식혜가 뒤를 이었다. 대보름에는 부럼을 깨물고 나물을 먹었고, 한식에는 쑥떡을 먹었다. 계절마다 음식이 있었고, 음식마다 시간과 기억이 있었다.
나는 이런 것들을 먹고 자랐다. 자랑스럽다. 나를 키운 건 팔할이 고향의, 엄마의 먹거리였다. 해마다 계절은 같은 자리에 돌아왔고, 밥상도 그 계절을 따라왔다. 도시에서 자란 사람들은 내 이야기를 들으며 부러워한다. "그래서 몸이 그렇게 단단한가 보다." 하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오늘의 내 몸은 어린 시절 먹었던 음식들이 만들었다. 그리고 그 음식은 모두 어머니의 손에서 나왔다. 산과 들이 재료를 내어주었지만, 그것을 밥으로, 먹거리로 만든 사람은 어머니였다.
사람은 먹은 것으로 자라고, 사랑받은 만큼 살아간다. 나를 키운 건 팔할이 고향 먹거리였다. 어머니였다. 고맙습니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어머니.
이승주 / 광고대행사 미디어사업본부 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