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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포커스 출향인

‘소도둑’이 생각나는 라면

순창신문 기자 입력 2022.12.26 10:12 수정 2022.12.26 10:12

ⓒ 순창신문

삼양식품의 전중윤 사장이 남대문시장을 지나다가 ‘꿀꿀이죽’을 먹기 위해 줄을 길게 늘어선 사람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 ‘꿀꿀이죽’은 6.25 전쟁 당시 미군 부대에서 먹고 남은 잔반(殘飯), 즉 음식물 쓰레기 중에서 먹을 만한 부분을 건진 다음 이것을 죽으로 만든 잡탕 음식이다. 음식물 쓰레기로 만들었기에 돼지 사료에 빗대어 ‘꿀꿀이죽’으로 불렸던 이 기막힌 음식 앞에 늘어선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이것마저도 배불리 먹을 수 없는 처지에서 한 그릇에 5원씩 하는 이 죽으로 삶을 이어가고 있는 도시 빈민층의 모습은 그의 뇌리에서 한순간도 떠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저들에게 값싼 음식으로 배부르게 할 수 있을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바로 일본에서 먹어 보았던 ‘라멘’을 떠올렸다. 그때부터 그는 동분서주하면서 라면 생산에 몰두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일본의 ‘라멘’을 국내로 들여와 연구를 거듭하고, 기술 이전을 위해 노력한다. 처음에는 단호하게 거부했던 일본의 라멘회사 담당자가 전중윤 회장의 열정에 감동하여 기계와 기술 이전에 도움을 주면서 라면을 생산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주황색 봉지에 한자로 ‘三養(삼양)라면‘이었다.

라면은 식사 대체용으로는 왠지 조금 모자라지만, 간식용으로는 적절한 식품이다. 바빠 시간이 없을 때 요기(療飢)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국내 라면 생산 역사 60년에도 여전히 잘 팔리는 이유다. 처음으로 라면을 생산한 것이 1963년 9월 15일이라 하니 이제 환갑을 맞고 있다. 그동안 라면 제조 회사가 여러 개로 늘어났고, 다양한 종류의 라면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고 보니, 내 또래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라면이 세상에 나온 것이다. 시골에 사는 우리로서는 당시만 해도 라면을 쉽게 맛볼 수 있는 음식이 아니었다. 당시 커피 한 잔이 35원이고, 김치찌개나 된장찌개값이 30원이었다. 이에 비해 라면값은 10원으로 상대적으로 싼값이었지만, 시골에서는 쉽게 아무 때나 먹는 음식이 되지는 못했다. 물론 문화적 차이도 한몫했을 것이다. 시골에 살았던 나로서는 짜장면을 처음 먹어 본 것이 중학교 1학년 때 읍내에서 열린 문예 백일장에 출전했을 때였다.

아무튼, 내가 처음으로 라면을 맛본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인 1969년이다. 라면이 이 세상에 나온 지 6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이 사실만으로도 당시 시골 삶이 얼마나 어렵고 팍팍했는가를 짐작할 것이다. 동네 친구 K 덕분에 라면을 먹어 본 것이다. K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할아버지와 함께 사는 친구였다. 그해 여름날, 친구는 자기 할아버지가 논둑에 옷을 벗어놓고 논의 김을 매고 있을 때 쌈짓돈을 훔쳤다. 친구들이 한쪽에서 떠들면서 할아버지의 정신을 혼란스럽게 하고, 그 친구가 살금살금 도랑으로 기어가서 할아버지의 옷 속에 들어있는 쌈지를 열고 500원짜리 지폐 한 장을 훔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참 영악했던 것 같다.

그 돈으로 우리에게 한턱을 냈는데, 그것이 라면이었다. 학교 앞 가게에서 라면은 끓여 먹었던 그때 그 맛은 얼마나 오묘하였는지, 게다가 훔친 돈으로 사 먹는 맛에 적당한 정도의 두려움까지 섞였으니 이는 아는 사람만 알 것이다. 지금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데, 여기서 끝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500원의 거금은 우리에게 여러 차례 라면을 시식할 기회를 주었다. 그러면서 어린 우리 마음속에는 늘 얻어먹는 것이 미안할 정도의 양심(?)이 살짝 생기기 시작했다. 맨 먼저 양심의 변화(?)를 보인 친구가 할머니와 단둘이 사는 B친구였다. 그가 어느 날 자기 할머니의 지갑에서 돈을 훔쳐 나와 라면을 사주는 것이었다. 이런 일이 여러 번 있고 난 후, 더욱 난감해진 것은 아직 라면을 사지 못한 친구들이었다. 그러던 차에 아버지가 소 판 돈을 쌀독에다 숨겨 놓은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500원짜리 지폐 한 장을 훔쳐냈고, 친구들에게 그동안 얻어먹은 대가를 기분 좋게 치렀다.

그러나, 곧 들통이 나고 말았다. 어느 날 새벽이다. 아버지가 시장에 가서 소를 사려고 돈을 세 보니, 500원이 부족한 것이었다. 여태껏 이런 일이 없었는데, 누가 손을 댄 것이 틀림없다고 판단하고 가족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 불똥이 맨 먼저 어머니에게로 갔다. 어머니가 펄쩍 뛰니까 다음 순서는 자연스럽게 내 차례가 되었다. 아버지께서 나를 깨우시더니 조용조용한 어투로 심문하기 시작했다. 처음에야 아니라고 했지만,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금세 말씨가 어눌해지면서 실토하고 말았다. 그날 새벽. 나는 아버지로부터 가느다란 무궁화 가지로 호된 체벌을 당했다. 지금도 생각하면 종아리에 척척 감기는 무궁화 회초리의 위력은 대단했다. 그날은 어머니도 크게 실망하신 듯 조금도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나는 한참 동안 매를 맞다가 가까스로 탈출할 수 있었다. 팬티 한 장 달랑 차고 매를 맞았으니 달리 도망갈 곳도 마땅치 않았다. 고샅으로 달아나면 동네 사람들이 알게 되니, 뒤쪽 산으로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새벽이슬에 젖고 나니 몸도 마음도 추웠다. 마을 사람들에게 이 사실이 알려지면 얼마나 창피한 일인가. 몸을 바짝 오므리고 묏등 뒤에 숨어 있는데, 어디선가 인기척이 나는 것이 아닌가. 누군가가 이 사실을 안다면 아까 매 맞은 아픔보다 열 배 백 배 괴로운 일이 벌어질 것이다. 바짝 긴장하고 있는데, 우리 동네에서 말을 가장 잘 옮기고 다니는 일명 ’떠버리 형‘이 묏등으로 올라오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나를 보고 묘한 웃음을 짓고 있는 것이었다. 그의 얼굴을 보자 두려움이 가득 일었다. 나는 이것저것 생각할 틈도 없이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형, 제발 소문내지 말아 줘요."

나는 그 뒤로 ‘라면’을 먹을 때마다 이때의 추억이 떠올랐다. 어떻게 생각하면 참 철없는 일이지만, 라면 때문에 남들이 갖지 않은 이런 추억을 가졌다는 사실만으로도 든든하다. 요즘 아이들이야 이런 우리 또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날 500원짜리 돈을 잃어버린 것보다는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될까“ 걱정하셨던 아버지의 마음이 애틋이 그리워진다. 아무 탈 없이 공직에서 정년퇴직했고, 이제 스스로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고 있음을 아버지도 만족하실 것이다.

송일섭 / 꿈매니저, 글밭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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